위험한 의학

대의학의 뿌리는 서양의학이다. 고대 히포크라테스의학으로부터 시작된 서양의학은 19세기 말 감염증을 발견하고, 병원성 미생물을 없앨 수 있는 약을 등장시키면서 세계 의학으로 성장할 빗장을 열었다. 당시 인류의 가장 무서운 적인 병원균을 제압할 항생제가 등장하고, 혈액형을 분류해내 수혈을 가능하게 하고, 마취제를 만들어 외과 수술이 용이해지면서 현대의학은 빠르게 발전해왔다. 전염병으로 전멸하던 사람들을 구해내면서, 응급상황에 처한 사람을 수술로 살려내면서 현대의학은 엄청난 위상을 얻었다.

현대의학은 그 후 과학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산업 혁명 이후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태동한 과학적 의학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그에 앞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1910년에 발표된 ‘플렉스너 보고서(Flexner Report)’이다. 표준화된 과학적 의학교육의 기준이 된 플렉스너 보고서를 기반으로 의학과 의료제도가 만들어졌다. 그 후 현대의학은 명실상부한 ‘과학적 의학’을 자부하며 세계의 주류 의학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현대의학은 빠르게 진보를 거듭했다. 의료 진단 장비의 발달로 인체를 세밀하게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고, 질병을 분자생물학적 차원으로까지 진단해내고 있다. 또한 교통사고와 같은 응급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너끈히 구하고 있다. 응급의학과 급성 질환, 외과 질환에서 큰 성과를 낳으며 인류를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불어넣었다. 이런 기대감은 의사인 나도 함께 품고 있었다. 현대의학을 전공하면서 의학의 진보가 사람들의 질병의 고통을 덜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더욱 열정을 다해 매달릴 수 있었다.

진료모습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병원은 규모를 자랑하며 나날이 번창하고 있고, 첨단 검사장비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무슨 난치병에 획기적이라는 신약이 계속 쏟아지고 있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린다는 첨단 수술법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최첨단 의료 테크놀로지의 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인간의 질병의 고통은 여전하다. 아니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더욱 늘고 있다. 첨단이라는 이름으로 하루가 다르게 의학이 발전하는데도 온갖 난치병이 난무하고, 의학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만성병이 늘어나고, 약물 남용으로 내성을 가진 슈퍼균이 등장하고, 과잉 치료로 인간의 면역력은 저하되고, 병원 치료로 인해 오히려 병을 얻는 의원병 환자는 늘어나고, 개인과 나라의 의료비용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없는 병도 만들만큼 의료 상업주의가 팽배한 현실 속에서 현대의학이 쌓아온 절대적인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

오늘날 현대의학은 ‘병든 사람을 치유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진정한 의학으로서의 존재 가치마저 흔들리고 있다. 아무리 지난날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 사람들의 질병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학의 진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가 못하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학이 실패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것은 ‘첨단’ 의학이 아니라, 첨단에 대한 ‘환상’ 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과대평가 되고 있는 현대의학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건강을 의존하고 있는 주류의학이기에 더더욱 냉정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지난날 이룩한 성과에 도취해 스스로 부딪힌 한계와 문제점마저 외면한다면, 결국 더 이상의 진보는 없을 것이다. 진보는커녕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위험한 의학’으로 낙인이 찍힌 채 추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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